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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록수 협동조합의 회원들 공간입니다.
 
 
작성일 : 15-10-03 07:13
어란여인의 흔적을 찾아서_박영선
 글쓴이 : 상록수
조회 : 2,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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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란여인의 흔적을 찾아서1: 어란여인과 박승룡 어르신

*추석날 오전, 해남군 송지면 어란에 있는 여낭터(어란 여인이 바다어 뛰어들어 죽은 낭떠러지)를 어렵게 어렵게 찾아 다녀왔다.

*왜군의 포로로 잡혀 시중들었던 젊은 적장(간 마사가게)을 사랑한 어란여인...연인이 누설한 첩보를 이순신장군에게 전달해 명량해전을 유리하게 돕고, 명량에서 전사한 연인을 따라 투신한 비운의 사랑...

*작은 첩보 하나로 명량대첩에 아주 작은 도움을 줄 수는 있었어도, 민족의 성웅 이순신장군의 명량대첩의 업적을 폄하할 수도 있다는 학계/행정의 반대도 심하고...

*명량해전 이후 송지면을 거의 몰살시키다시피 한 뼛속까지 저주스러운 왜군의 장수를 제 정신으로 사랑할 수 있느냐는 원초적 비난...

*일제강점기때 해남에 근무한 일본순사(사와무라 하찌만다로)가 기록한 이야기를 바탕으로 어란여인의 고증이 시작되었는데 그 기록의 의도가 명랑대첩을 폄하하기 위한 의도이지 않았을까 하는 의심들...

*고려 말부터 어란 사람들이 바닷일의 안녕을  기원하는 대상인 당의 신이 하필 적장을 사랑한 여자였겠느냐하는 지역민들의 부정적 여론... 

*이런 상황에서 10 여년 사비를 털어 꿋꿋히 역사적 사실 자료를 모으고 추모회를 리드해오신 분이 박승룡 (89)어르신이다.

*정사로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과 야사로 받아들일 부분이 분명 존재한다. 이부분은 좀더 관심을 가지고 나름 객관적 고증을 해볼 생각이다. 
*박승룡어르신과 너무도 깊게 공감하는 부분이 있었다. "적국을 초월한 사랑, 그러나 버릴 수 없었던 조국에 대한 충정". 조선이 못지켜낸 바닷가 한 여인이 죽음으로 끝을 맺어야 했던 가슴아픈 사랑의 이야기...

*이미 복잡해진 머리를 하고서 남해안 다도해가 보이는 바닷가 작은 숲길을 따라 여낭터를 향했다.

@어란여인의 흔적을 찾아서2: 어란여인의 마지막을 지켜본 바닷가

*바닷바람이 매서운 바닷가 바위틈에 보라색 짙은 층층이꽃이 피었다. 눈찔레꽃은 그리움으로 바다를 향해 뻗고 해국은 몽글몽글한 잎으로 땅바닥에 바짝 엎드렸다. 염해를 입어 나신을 드러낸 곰솔아래에는 사스레피나무가 검은 열매를 맺었다.

*명량(울돌목)을 향해는 유독 둥그스름하고 단정한 바위 뒤로 기암괴석이 움푹패여 비를 피하는 곳에 조그마한 어란여인 동상이 서 있다(통통하고 미소짓는 표정은 아쉽다^^;;). 

*난중일기에 "9월 14일 어란진에 있었던 일로 김중걸이 왜에 붙잡혀 왜선에 감금될때 김해인이라는 여인이 결박을 풀어주어(적장 간 마사가게가 무의식중에 발설한 명량해전 출전기일)기밀을 제공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선조 30년 이순신은 외선 중에서 여인으로부터 정보를 탐지하여 곧장 장계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난중일기의 '김해인'과 조선왕조실록의 '여인'이 일본순사(사와무라 하찌만다로)의 유고집에 기록된 이순신장군의 간첩 미기(美妓) 어란(於蘭)은 동일한 인물로 유추된다.

*어란이란 여인은 기생이든, 전쟁포로든 이순신장군이 중요하게 다룬 첩보활동을 돕는 김해사람 또는 김씨성의 실존 인물인듯하다. 

*일본순사(사와무라 하찌만다로)의 유고집에는 그 여인의 이름이 어란(於蘭)이라고 기록되었다. 김해사람이 기생으로 이곳까지 끌려왔는지, 어란부근에 살았던 한 김씨여인이 전쟁포로로 잡혔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여인이 죽은 어란진의 이름을 붙혀 어란이라 한것이 가장 논리적이다.

*500 여년 동안 잊혀졌던 어란여인은 박승룡 어르신의 끈질긴 노력으로 세상 밖으로 나왔다. 여낭터에 해당화는 어디가고, 갯찔레(돌가시나무)가 해풍에 패인  바위를 타고 명량바다를 향해 애처로이 열매를 맺었다.

@어란여인의 흔적을 찾아서3: 어란여인은 누구인가?
*어란여인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 정유재란 당시 어란진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역사를 좀더 깊숙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아래는 음력임).

-1597년 음력 7월 15일(양력 8월 27일) 칠천량 해전 패전
-7월 23일자로 이순신에게 삼도수군통제사 임명장이 내리고 8월 3일 이순신장군에게 도착
-8월 18일 장흥 회진포에서 배설로부터 배 12척을 인계 받음
-8월 20일, 갑판 개조를 끝낸 12척과 한척을 더해 13척의 군함으로 함대를 구성하여 이진(梨津)으로 이동
-8월23일 이순신장군이 이끄는 13척의 수군은 어란포(於蘭浦)에 정박
-8월 28일 오전 6시. 뒤쫒아 오는 왜선 8척을 공격, 줄행랑치는 외군을 이순신 함대는 갈두(葛頭)까지 추격하다가 회군. 이순신 장군이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한 이후 치른 첫 번째 전투인 어란포 해전. 어란진을 출항해 장도(獐島_송지면 내장리_현재 육지화)에 옮겨감
-8월29일 야음을 틈타 벽파진(진도군 고금면 벽파리)으로 옮겨 진을 침
-9월 6일 김중걸이 달마산(송지면 서정리)으로 도망갔다가 왜놈에게 붙잡혀 결박당해 왜선에 실렸더니 임진년에 포로가 된 김해 사람으로 이름 모를 어떤 이가 왜장에게 빌어 묶인 것을 풀어 주었고 그날 밤 김해인이 김중걸의 귀에대고 기밀을 제공(9월 14일 난중일기)
-9월7일 조선의 13척 함대를 잡기 위해 55척의 대함대를 구성하여 추격, 왜선 55척 가운데 13척이 이미 어란 앞바다에 이르름. 오후 10시. 야습을 대비하고 있던 벽파진을 공격 (9월 8일 오후 4시경?) 이순신이 이끄는 함대 공격으로 별동대 13척은 일부 격칩되고 일부 큰 피해를 입고 도망가 버림
-9월 8?일. 왜군의 신형 전함들을 모두 벽파진에서 70리 떨어진 어란진에 집결하도록 명령. 전함 200여 척과 한강 마포에 상륙을 준비하던 일본군 10만이 어란진으로 모여듬
-9월 9일, 기다리던 왜군 척후선 2척이 나타나 벽파진에 있는 이순신 함대의 동태를 면밀히 정탐하고 돌아감
-9월 14일, 어란진을 감시하던 척후 군관 임준영이 정탐 임무를 끝내고 돌아옴. 어란진에 주둔한 왜군의 수는 전함 200여 척에 거함만 55척인 초대형의 함대. 또 그 병사의 수는 10만에 이르는병력. 명량해전 작전회의를 함
-9월 15일, 왜군의 공격이 있을 것으로 예상한 이순신장군은 해가 떨어지기를 기다렸다가 순류를 타고 전 함대를 몰아 명량 해협을 통과하여 벽파진에서 우수영으로 이동
-9월 16일(양력 10월 25일), 일본군 연합 함대는 어란진을 발진하여 벽파진으로 총출격. 그러나 이순신의 함대는 이미 우수영으로 이동하여 진을 치고 있다 해전사에 빛나는 명량대첩이 있었음. 이순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 13척이 명량에서 일본 수군 130여 척을 격퇴한 역사적인 해전..
-1597년 9월17일 명량해전 다음날, 어란여인은 연인의 사망소식을 듣고 여낭터에서 투신. 어란진 선착장까지 떠내려온 여인의 시신을 한 어부가 수습하여 근처 소나무 밑에 정성껏 묻음. 묘 앞에 석등을 세우고 불을 밝혀 그녀의 영혼을 위로함. 어란포구 등대가 서있는 언덕위에 석등롱(石燈籠)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음

*명량해전 당시 왜군들은 이순신의 복귀를 알지못한 싯점이라 13척의 조선 수군 잔당을 처리하고 10만의 보병을 한양으로 곧장 수송하러 가는 정도로 가볍게 생각했다. 정유년(1597년)보다 5년 전인 임진년(1592) 경상도 김해 부근에서 잡혀온 여인이라면 설령 전투함에 실려 왔다손 치더라도 굳이 가벼운 전투를 앞두고 어란진에 남겨진 이유가 무엇일까?

*일본순사(사와무라 하찌만다로)의 유고집에 나오는 어란이라는 이름은 김해출신의 여인이든 김해김씨성의 어란진 주변에 살았던 여인이든, 투신한 여낭터가 있는 어란진의 이름을 붙힌듯 하다.

*어란여인은 이순신장군이 심은 첩자인지 알 수 없다. 김중걸에게 전달한 첩보가 명량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주장도 너무 비약이라는 것을 알 수있다.

*분명한것은 이 조일전쟁의 중심에서 조선이 지켜주지 못한 민초이지만 가슴속에 조국에 대한 사랑을 버리지 않은 여인이라는 점이다.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사랑은 도덕적 윤리적인차원을 넘어 결국에는 종교적으로 금지하는 자살로 끝을 맺는다. 한편 독일의 시인이자 극작가 실러의 희곡 "오를레앙의 처녀"는 프랑스의 영웅 잔다르크가 영국장교를 사랑하지만 세속적인 사랑을 극복하고 전쟁에 승리한다. 누구나 다 아는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설화도 적국의 두남녀의 사랑이야기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랑은 모든 종교와 윤리, 이성을 뛰어넘는다. 

*사랑은 그런것이다~~~~~

*어란여인은 이름없는 민초요 적장을 사랑하게된 평범한 전쟁의 여인이다. 그러나 자신을 버린 조선에 대한 충정을 버릴 수 없어 사랑하는 사람을 죽음에 몰아 넣고만다. 조국이냐 사랑이냐? 어란여인은 그 둘다를 선택한다. 자신을 버린 조선의 바다에, 연인이 죽은 그 바다에 몸을 던졌다. 그리고 역사속에서 사라졌다~~~~~~

@어란여인의 흔적을 찾아서4: 어란여인은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는가?

*재야 역사 학자 박승룡 어르신과 추석날 오후1시 30분, 산정 우체국 바로옆 사랑채다방에서 만나뵜다.

*89세라고 믿기지 않는 건강하고 준수한 용모에 박식한 역사지식, 그리고 국경을 넘는 사랑을 이해하는 문학적 낭만도 있으신 매력적인 분이었다.

*어란여인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해가 안되는 부분은 질문을 던지면서 구체적으로 확인했다.

*중간에 택시를 타고 어불도가는 선착장 부근에 있는 어란여인 추모비와 석등롱(石燈籠)에도 직접 다녀왔다. 

*신의 계시와도 같은 사명감을 가지고 어란여인을 10 여년 고증해오신 박승룡어르신에게 어란 여인은 어떤 의미인가 여쭈었다.

“그것은 ‘어란’여인에 대한 나의 믿음이요, 역사에 대한 반성과 관용, 나아가 평화를 갈망하는 대부분의 한·일 국민들이 평화적으로 교류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램에서 시작됬다”고 회고했다.

*앞에서도 언급한 박승룡어르신과 내가 너무도 깊게 공감하는 부분은 "적국을 초월한 사랑, 그러나 버릴 수 없었던 조국에 대한 충정". 조선이 지켜주지 못한 바닷가 한 여인이 죽음으로 끝을 맺어야 했던 어란여인의 가슴아픈 사랑의 이야기라는 점이다.

*박승룡어르신이 어란여인에 대해 관심을 가지신것은 단순한 역사적 관심이 아니었을거다. 해남 송지에 대한 사랑을 넘어, 역사를 왜곡하는 아베같은 악마적 광기를 가진 일본인인이 아닌 평화를 사랑하는 많은 서민들과 평화의 교류를 꿈꾸셨을것이다.

*그 뜻을 조금이나마 공감하고 지지하는것이 해남 송지가 고향인 나로써 할 수있는 작은 역할이 아닌가 생각된다.

@어란여인의 흔적을 찾아서5: 손끝으로 전달된 30년 전의 텔레파시

*초등학교때 산정 장터입구 장석거리 모퉁이에 삼성상회라는 상점/문방구가 있었다. 그 주인 아저씨는 잘생기고 인자한 얼굴을 하고서 항상 우리를 반갑게 맞는다.

*돈을 계산할때 동전을 얼른 드리지 않으면 돈을 쥔 손가락을 살짝 꼬집는다. 은근히 그게 재밌다. 그 어른은 그것이 손님에게 대한 마음이고 언제나 그렇게 해서 가슴깊이 각인되는 사탕같은 매력이 있었다.

*박승룡(89)어르신을 처음 알게된것은 페이스북댓글을 통해서다. 2015년 9월 추석을 앞둔 어느날, 송지면 면소재지 중심지 활성화사업을 외곽지원하기 위해 만든 "대륙의 시작, 땅끝 송지면"이라는 페이스북그룹에 사업당선 축하글을 올렸다. "수고가 많았다"는 댓글이다.

*며칠 후 다른 글에도 댓글을 달으셨는데 마침 초등학교 교감을 하고 있는 동창 박은미가 댓글을 달다 가까운 집안 박승룡어르신의 댓글을 보게 되었다. 서로 족보의 학렬을 비교하다 마음을 텄다. 내게 있어서도 족보상 할아버지에 해당하는 꽤 가까운 집안의 어르신이었다.

*며칠 후 전화가 왔다. 연세가 89세인 분이 페이스북을 한다는 것도 신기했는데 어란여인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해주신다.

*'정유재란때 왜장과 사랑에 빠졌던 어란여인이, 연인이 무심결에 발설한 첩보를 이순신장군에게 전해 명랑해전이 승리하도록 작은 도움을 주었다. 그 다음날 연인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명랑에서 가까운 여낭터 바위에서 투신해 목숨을 끊었다'는 비극적 사랑의 이야기였다.

*어란여인에 대한 기사를 찾아보면서 서서히 박승룡어르신과 어란여인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2015년 9월 26일, 산정 우체국 옆 사랑채다방에서 1시반에 만나자는 문자를 받고 처음 뵙는 순간, 90에 가까운 분이 준수한 외모에 건강한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어디서 많이 뵌분인데...

*어란여인과 여낭터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듣고 궁금한것은 질문하면서 대화를 했다. 중간에 투신한 어란여인의 시신을 거둬 묻어주었다는 석등롱(石燈籠)에도 택시를 타고 다녀왔다.

*집착과도 같은 어란여인의 고증이 어르신께 어떤 의미일까 굉장히 궁금했다. 그것은 쓰라린 가족사에서 출발하여 죽음에 문턱까지 갔던분이 세상에 던지는 용서와 화해의 몸짓이라는 생각이들었다.

*집안에 4명의 아들이 있었다. 셋째형은 1944월 4월 1일부터 목포 산정소학교 교사로 재직하다 그 해 10월 일제에 의해 강제로 징집됐고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때 사망했다.

*큰형과 둘째형은 6.25때 잘사는 집 아들들이라고 붙잡혀 산정에서 가까운 바닷가 소나무밭에서 북한군도 아닌 지역사람들의 손에 총살당했다.

*어란여인이 조선이 버린 비운의 여인이었던것처럼 박승룡 어르신도 대한민국 역사의 희생양이었다. 그때 광주 서중을 졸업한 20대 초반 꿈많은 청년은 정신적인 충격으로 걷지도 못하는 중병에 걸려 세상과 담을 쌓았다. 어머니도 화병으로 두 눈이 멀었다.

*한 5년을 그렇게 집안에서 나오지 않다 주위의 도움으로 결혼을 하게 된다. 몰락한 집안에다 정신적 육체적으로 깊은 병에 걸린 시절, 필사적으로 살아남기 위해 온갖 일을 하게 된다. 그 일중 하나가 내 어릴적 기억이 남아있는 삼성상회이다.

*80이 다되어 일을 그만두고 셋째형의 발자취를 찾아 나서다 우연히 알게된 어란여인의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고증하기 시작한다. 그 이후 신의 계시와도 같은 어떤 힘에 의해 10 여년 남은 기력을 모두 어란여인에 바쳤다.

*추석 이후 서울에 올라와 나름 고증을 했다. 몇 가지 부분에서 어르신의 고증과 차이가 있었다. 페이스북 그룹에 연재하면서 이 부분은 많이 염려가 되어 다음과 같은 문자를 보냈다.

"어르신. 저의 글이 다소 불편할것이라고 잘알고 있습니다. 역사의 기록이라 최대한 많은 사람들의 지지와 사랑을 받을려면 정사와 야사를 구분하면서 접근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앞으로도 의문나는 부분은 하나씩 풀어갔으면 합니다. 저의 짧은 소견이 어르신의 10년의 노고를 왜곡하지 않을까 우려스럽습니다. 

결국에는 한일우호, 민간교류로 가고자 합니다. 규슈와 어란항 직항로가 열렸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나의 이런 반론이 분명 불편했을것이다. 그 순간적인 감정을 이겨내고 쓴 댓글은 내가 앞으로 한일우호에 어떤 역할을 해야하는지에 대해 깊은 자각을 하게 만들었다.

*페이스북의 댓글은 이렇다.

"수고 많이 하셨네. 실증주의 학자와 상대주의 학자에 따라 그 견해 차가 심했으나 세월의 흐름에 따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추세이고 10년이라는 세월이 지난 금년도에는 각종의 언론 매체에서 "사실로 확인됬다"로 표현 하고 있다. 어쨌든 '어란' 여인의 이야기는 나라에 충성, 인간애 라는 두 날개를 갖는 멋진 스토리로 이 고장의 문화관광 자원으로 육성해 주었으면..."

"세계 대표적 미래연구소인 코펜하겐 미래연구소는 이젠 정보화시대는 가고 장차 멋진 이야기를 가진 자가 세계시장을 지배한다고 말했다. 아름다운 자연이나 관광지에 얽힌 스토리를 발굴한 것이 역사적 유적 못지않게 중요한 요소가 된다는 것이다. 호국여인 '어란'은 그 얼마나 멋진 스토리텔링 주제인가. 울돌목이 바라보이는 만호바다에 몸을 던진 혹발의 悲戀의 주인공이다. 문화관광자원으로 육성하자...

*나는 이땅의 백성들이 일본에 갖는 적개심을 충분히 이해한다. 또한 그 분노가 두렵다. 박승룡어르신에게 정말 궁금한점이 조선을 유린한, 셋째형을 죽게한 일본을 용서하고 문화적교류를 할 수 있는가 였다. 그 대답은 내게 보낸 메일로 충분했다.

"어란 여인의 발굴은 痛憤에서 寬容으로 寬容에서 평화의 希求로 이어간 나의 宿命 이었나봐. 그래서 나는 일본의 개개인은 싫지가 않게 되었네. 그랬더니 모든 일본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네.

나는 누구보다 부모 형제를 좋아하고 따르는 막동이... 아버님의 지시로 지금도 '어란'을 위해 멈추지 말아야지 하고 다짐하고 있다네."

*여러 생각에 잠겨있을때 박승룡어르신이 운영하던 삼성상회의 추억이 떠올라 문자를 보냈다.

"제가 어르신의 뜻을 이루도록 작은 힘이나마 보태겠습니다. 글고 이제서야 생각났는데 삼성상회에서 무엇을 살때마다 어르신이 동전을 쥔 손을 꽉 꼬집었습니다.

30년 전 그 체온, 눈빛, 웃음띤 인자한 얼굴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곧 댓글이 왔다.

"이 메시지를 보고 감격했다네. 정말로 큰꿈이 이루어질것 같네~~~~"

*ET 영화에서 처럼 30 여년 전, 60 환갑의 박승룡어르신이 초등학생인 나의  손끝을 꼬집으시며 '미래에 다시 꼭 만나자'는 텔레파시를 보냈던걸까? 

*89세의 재야 역사학자의 뜻을 도와야 할 필연이었던가~~~~~

@어란여인의 흔적을 찾아서6: 울돌목에 핀 해당화 '어란'

'어란'의 투신. 왜일까? 
조국이냐? 인간 사랑이냐? 
'어란'은 조국과 "인간애" 라는 두 날개를 갖는 순결한 순애보(純愛譜)이다. -박승룡-

*어란 여인에게 바치는 진혼가(레퀴엠)... 레퀴엠(requiem)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짜르트의 최후의 미완성곡이다. 모짜르트는 1756년 1월 오스트리아의 음악도시 잘츠부르크에서 태어난 '음악의 신동'. 궁핍한 생활에도 불구하고 600 여 곡을 작곡한 그는, <레퀴엠> Lacrimosa( 눈물과 한탄의 날)를 마지막으로, 미완으로 남겨둔 채 1791년 12월 서른다섯의 나이로 빈에서 세상을 떠난다. 장례를 치를 돈도 넉넉치 않아 묻힌곳도 알수없는 천재 음악가~~~ 레퀴엠.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이 고조 된 상황에서 살리에르의 질투의 음모에 이끌려 자신의 목숨을 대신 바친 등신불같은 오케스트라... 가슴이 아프다. 생각만해도~~~~17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난  200 여년 후의 일이다. 

*추석때 송지면 어란에서 시작된 이 긴 글을 마무리할때가 되었다. 이순신장군의 첩보활동을 한 애국애족의 어란여인 보다는 적장을 사랑한 그러나 조국을 목숨으로 지킨 비련의 여인으로 몰고가지 않았나 우려도 된다. 

*나의 가슴아픈 마음을 박승룡(89) 어르신의 "어란여인 진혼가"로 대신하면서 마무리한다. 

*어란여인 진혼가- 박승룡-

梅峰에 초생달이 떠 오른다. 
울돌목 격랑소리 들리는 가매섬에 
어란의 노래가 메아리치네. 

끓어 오른 분노일랑 바다 위에 던져 놓고
임의 입 맞춤은 오직 조국 뿐
불타는 정열 의로운 그 혼 어이 헛되랴 어이 헛되랴. 

흐르는 바다물은 길이 길이 흐르나니 
파도치는 물결 위에 
아! 청순한 난의 향기 흘러라 흘러라 빨갛게 떠 흘러라. 

달마의 모종소리 은은도 한데 임을 향한 진혼가는 온 누리 흔드네.


-글/사진: 박영선(갤럭시노트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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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희 15-11-15 09:49
답변 삭제  
어머낫....
놀람으로 가슴을  진정시키며
진혼가에 귀를 기울입니다~

재야의 학자님들께 존경의 마음으로
(( ))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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